왜 중간정산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나
2012년 7월 26일 이전까지는 근로자가 요청하면 회사가 자유롭게 퇴직금 중간정산을 해줄 수 있었다. 많은 근로자가 주택 자금이나 결혼 자금으로 중간정산을 받았고, 회사도 인건비 부담을 일부 해소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이 관행이 한국 직장인들의 노후소득을 광범위하게 훼손한다는 비판이 누적되면서, 정부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퇴직급여법) 제8조 제2항을 개정해 중간정산을 원칙 금지로 전환했다.
현재는 같은 법 시행령 제3조에 열거된 법정 사유에 해당해야만 회사가 중간정산을 해줄 수 있다. 심지어 그 사유에 해당하더라도 회사가 반드시 정산해줄 의무는 없다. 회사 입장에서 거부할 권한이 있다는 점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법정 중간정산 사유 (퇴직급여법 시행령 3조)
1호. 무주택자 본인 명의 주택 구입
신청 시점에 본인 명의의 주택이 없는 근로자가 본인 명의로 주택을 구입할 때 가능하다. 계약일과 잔금일 모두 신청 시점의 무주택 요건을 충족해야 하며, 배우자 명의로 주택을 사는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가장 흔하게 활용되는 사유다.
2호. 무주택자의 전세금·보증금 부담
무주택 근로자가 본인 거주 목적으로 민법상 전세금(303조) 또는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보증금(3조의2)을 부담해야 할 때 가능하다. 단, 한 사업장에서 한 번만 인정된다. 같은 회사에서 전세금 사유로 두 번 신청할 수 없다.
3호. 6개월 이상 요양 의료비 부담
근로자 본인·배우자·부양가족이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질병이나 부상을 당하고, 그 의료비를 본인이 연간 임금총액의 1,000분의 125(=12.5%)를 초과하여 부담해야 신청 가능하다. 요양 기간과 의료비 두 조건이 한 호에 묶여 있으므로, 진단서와 의료비 영수증 모두 필요하다.
4호. 5년 이내 파산선고
신청일로부터 거꾸로 5년 이내에 법원의 파산선고(채무자회생법)를 받은 경우 가능하다.
5호. 5년 이내 개인회생절차 개시 결정
신청일로부터 거꾸로 5년 이내에 법원의 개인회생절차 개시 결정을 받은 경우 가능하다. 파산(4호)과 개인회생(5호)은 시행령상 별개 호로 분리되어 있다. 각각 결정문·판결문 사본을 첨부한다.
6호 ~ 6의3호. 임금피크·근로시간 단축 등 임금감소 사유
회사가 정년 연장이나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근로자의 임금이 줄어들거나, 사업주의 사정으로 근로시간이 단축되어 퇴직금 산정 기준이 낮아지는 경우다. 시행령은 이 임금감소 사유를 6호와 6의2호·6의3호로 세분화해 정해두고 있다. DB형 퇴직연금은 마지막 평균임금 기준이라 임금피크 이후 퇴직금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 이 손실을 막기 위해 임금피크 진입 전에 중간정산을 신청할 수 있다. 실무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사유 중 하나다.
7호. 천재지변 등 고용노동부장관 고시 재난
태풍·지진·화재 등 자연재해 또는 본인 책임 없는 사고로 거주지가 파손되어 긴급한 자금이 필요한 경우 가능하다. 가장 사용 빈도가 낮은 사유다.
신청 절차
- 1단계 — 사유 증빙 준비. 무주택은 등기부등본·주민등록등본, 요양은 진단서·의료비 영수증, 임금피크는 회사 인사 발령 공문 등.
- 2단계 — 중간정산 신청서 제출. 회사 인사부서 또는 퇴직연금 사업자에게 제출. 사업자의 양식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3단계 — 회사 승인. 사유가 충족되어도 회사는 거부할 권한이 있다. 노조나 인사위원회를 통해 협의하는 경우도 있다.
- 4단계 — 정산 금액 산정. 신청일 기준 평균임금 × 30일 × (입사일~정산일 근속연수)로 계산.
- 5단계 — 지급 + 근속 리셋. 정산일 이후 근속은 0년부터 다시 시작된다.
중간정산의 숨은 비용 두 가지
비용 1. 노후소득 손실 (가장 큰 위험)
중간정산을 받으면 그 시점에 받은 금액이 곧바로 다른 용도(주택, 의료비 등)로 쓰인다. 반면 그대로 두었다면 퇴직 시까지 운용수익이 붙거나(DC형) 마지막 평균임금 상승으로 더 큰 금액으로 불어났을(DB형)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35세에 5,000만 원을 중간정산받으면, 그 돈을 만약 연 4% 복리로 30년 동안 운용했을 때 약 1억 6,200만 원이 된다. 중간정산은 이 미래 가치를 통째로 포기하는 것이다.
비용 2. 퇴직소득세 누진 효과
퇴직금은 근속연수가 길수록 공제가 커져 실효세율이 낮아진다. 중간정산을 받으면 근속이 리셋되므로, 같은 금액을 두 번에 나눠 받는 것보다 한 번에 받는 게 세금 측면에서 유리한 구조다. 예를 들어 30년 근속 후 1억 원을 한 번에 받으면 세금이 약 200만 원 내외인데, 15년씩 두 번 나눠 5,000만 원씩 받으면 합산 세금이 약 250~300만 원으로 늘어난다. 금액이 클수록 차이가 더 벌어진다.
실전 시나리오 — 임금피크 진입자
A씨는 25년 근속한 55세 근로자다. 회사는 56세부터 임금피크에 진입해 임금이 30% 감액된다. 현재 평균임금 기준 퇴직금은 약 1억 4,000만 원 수준이다. 만약 임금피크 진입 후 정년(60세)에 퇴직하면, 마지막 평균임금이 30% 감액된 상태로 산정되므로 퇴직금은 약 1억 1,200만 원으로 줄어든다. 약 2,800만 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셈이다.
이 손실을 막기 위해 A씨는 임금피크 진입 직전(55세 12월)에 중간정산을 신청한다. 정산 후 근속은 0년부터 다시 시작되지만, 임금피크 후 5년치 새 근속에 대한 퇴직금이 별도로 누적된다. 새 근속 5년치 퇴직금은 약 1,500만 원 수준. 총 수령액은 1억 4,000만 원 + 1,500만 원 = 약 1억 5,500만 원. 정산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보다 약 4,300만 원 유리하다. 이런 경우 중간정산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자주 하는 실수 5가지
- 배우자 명의 주택을 본인 무주택 사유로 신청 — 무주택 사유는 본인 명의 주택에만 적용된다. 배우자 명의는 인정되지 않는다.
- 전세금 사유 두 번 신청 — 같은 사업장에서 전세금 사유는 평생 한 번이다.
- 의료비 12.5% 조건 미충족 — 6개월 이상 요양 진단서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본인 부담 의료비가 연 임금총액의 12.5%(1,000분의 125)를 넘어야 한다. 두 조건이 한 호에 묶여 있다.
- 임금피크 진입 후 신청 — 임금피크가 시작된 후에는 사유 자체는 인정되지만 손실 회복 효과가 사라진다. 진입 직전이 가장 유리하다.
- 회사가 거부할 권한이 있다는 사실 모름 — 사유 충족 = 회사 의무 아님. 사전 협의가 필수다.
중간정산을 고려한다면 먼저 본인의 현재 퇴직금 추정치와 정산 후 잔여 근속에 대한 예상 퇴직금을 비교해보는 것이 좋다. 아래 계산기를 활용하면 입사일·정산일을 입력해 정확한 평균임금 기준 금액을 확인할 수 있다.